곽창수 회장, 곽한일(청주곽씨 여주파) 의병장 88주기 추모행사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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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담당부회장 작성일24-05-31 09:07 조회382회 댓글0건본문
청주곽씨대종회(회장 곽창수)는 30일 곽한일(청주곽씨 여주파 32세손) 의병장 송덕비(아산시 송악면)에서 개최된 서거 88주기 곽한일 의병장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덕용 사무총장과 노욱 호덕파회장, 노욱 호덕파사무국장, 노언 고문(여주파), 우신 여주파회장 외 유족 다수가 참석했다.
이날 곽창수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곽한일 장군은 청주곽씨 여주파 32세손이며 애국애족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받치신 대한민국의 영웅이라고 밝혔다.
곽한일 의병장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 38번지에서 1869년 12월 10일 출생하여 면암 최익현의 문하생으로 을미늑약 이듬해인 1896년 경기도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로 아산, 예산, 청양 등지에서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6년 4월 400여명의 의병을 인솔해 일본국네 대항해 돌격장으로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06년 11월 예산읍 일대에 의병 수백명을 배치하고 총공격 하기전 기밀이 누설되어 만종식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경무청으로 압송 후 경성평리원(서대문형무소)으로 이감되어 심한 문초를 겪었고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으로 점남 신안군 지도로 유배되었다.
한일합병 후 고종황제의 특사로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국권회복 운동과 독립의군부의 조직 구성, 군자금 모금 등을 주도하다 1913년 8월 일본군에 발각 체포되어 서대문형부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종신집행유예로 송악에서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아오다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6년 4월 순국하셨다.
1902년 한국유교의 정통성과 유교숭상을 내세운 대동정로를 편찬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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