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 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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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사의 시조공 위패

     

     

    시조(始祖) 곽상(郭祥)은 신라 헌강왕(憲康王)때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신진학자 동방의 석학(碩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연치를 뛰어넘는 교분(交分)을 나누었다.

     

    보론(補論) 고려의 벌족(閥族) 청주곽씨(淸州郭氏)는 중국에서 이민(移民)온 성씨임이 정설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곽씨는 우리나라의 김(金)이(李)박(朴)과 같이 그 성세(姓勢)가 큰 씨족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곽씨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막내동생 괵숙(虢叔)에서 그 유래되었다고 하나 너무도 가마득한 옛일이라 고증(考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당(唐)나라 때 전란을 피해 신라로 건너온 성씨가 비단 곽씨 만은 아닐 것이다.

     

    신라에 처음 건너온 곽씨는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이다. 곽자의는 당 현종(玄宗)때인 756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一等功臣)이다, 현종은 전란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아들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고 촉(蜀)나라의 산간벽지에 숨어살 때 신라의 景德王(경덕왕 재위 742-765년) 16년인 757년에 왕이 사신을 보내 현종을 위로하니 당나라 조정은 그 후의에 답례로 특사를 파견하여 감사의 뜻을 전해오게 된다.

     

    이 때 특사로 곽자의의 손자가 선발되어 동행(東行)길에 오를 때 어린 아들을 되리고 와서 아들은 남겨두고 돌아갔는데 그 아들의 자손이 곧 청주곽씨의 시조가 되었다.그러나 경덕왕 때에 신라에 남았던 이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그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신라 49대 憲康王(헌강왕 재위 875-88) 6년에 상공(祥公)이 侍中(시중 종1품)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상공(祥公)은 문장(文章)과 시(詩)를 잘 지어 덕망(德望)이 높았으며 당대의 석학(碩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도 교유(交遊)한 것으로 문헌록은 기록하고 있다.

     

    헌강왕 10년인 885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고운은 나이 29살에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라는 직(職)에 임명되어 출사하였는데 당시 상공(祥公)은 시중(侍中)에 재직(在職) 중이거나 시중을 그만 두고 은퇴해 있었거나 했을 때이므로 공(公)의 연치는 50중반에서 60종반 사이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나이 차이에도 서로 교유(交遊)한 것은 미루어 짐작컨대 첫째조정에 출사한 고운(孤雲)과 시중(侍中)인 공(公)이 자주 정사(政事)를 논의함에 따라 서로 의기투합했을 것이며 둘째당시 신라 조정은 이미 혼란상태의 연속이라 그 끝이 보이지 않자 고운은 조정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명사(名士)들과 교유(交遊)할 때 이미 은퇴해 있는 당대 대문장가(大文章家) 상공(祥公)과도 만나 나라를 걱정하고 그 분노를 문장으로 주고 받으면서 년치(年齒)를 뛰어넘는 우정(友情)을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족보(族譜)에는 청주곽씨의 시조(始祖)가 상공(祥公)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이후부터 곽자의 증손자가 신라에 정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최초로 정착한 이와 상공(祥公)과는 120여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에는 이름만은 전해지지 않으나 곽씨가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문은 연구(硏究)의 대상(對象)이니 후학(後學)들에게 그 짐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

    34 세 삼가파(三嘉派) 종손(宗孫) 노연(魯然) 서술(敍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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